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파병 이전: 이승만 정부의 파병 추진 == 사실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 베트콩 vs 남베트남 + 미국(+ 한국군 + …)의 전투만 생각하지만, 실제 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군과 [[베트민]]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전쟁이고, 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한국이 개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부는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6.25 전쟁 때 타국들이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알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이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해서 중단시켰다고 한다. 정확히는 "만약 한국군이 외국에 나가 작전을 벌인다면 주한미군 병사의 어머니들에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할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4.]하지만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민의 완승으로 끝나고, 결국 6월 [[제네바 합의|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해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 제네바회담의 휴전결정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한국군 파병을 미국 측에 제안했으나 이미 늦은 시점이기도 하고, 한국군 파병이 이익보다는 군사적, 정치적 불이익이 더 크다고 보아 거절했다.[* 송재경,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추진과 국회의 대응'': 의용군 파병논의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vol.116, 2020-06)]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과 휴전협정 과정에서 이승만과 반목한 것으로 유명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였고 이 시점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한국전쟁 재개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제안은 한반도 북진통일 구상과 맞물려 있다고 보아 부담을 느끼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미 북베트남이 거의 넘어간 상황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약속한 군축을 군축은 시켜야워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승만의 전쟁도 불사하는 반공행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파병 논의가 실패한 이후로도 꾸준히 베트남과 연계를 모색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방문하여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군사 및 경제 협력을 논의했고, 1959년에는 태권도 시범단이 남베트남에 방문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베트남 파병 논의는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승만 정부 시기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훗날의 박정희 정부 때 실행되는 파병논의와 구상에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